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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의 ‘생명력’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다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셸 실버스타인 지음)이라는 제목의 동화책이 있다. 이가 빠진 동그라미가 잃어버린 자신의 조각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다. 이가 빠진 탓에 빠르게 구를 수 없던 동그라미는 벌레를 만나면 잠시 멈춰 이야기할 수 있었고, 꽃을 만나면 향기를 맡을 수도 있었다. 정작 꼭 맞는 짝을 찾았을 땐 잠시 기뻐했지만, 이제 너무 빨리 구르게 된 나머지 기존에 누리던 삶의 즐거움들을 하나둘 놓치게 됐다. “이제야 알겠다”라며 깨달음을 얻은 동그라미가 자신에게 꼭 맞았던 조각을 조용히 내려놓고, 느리고 즐거운 여행을 택하는 것으로 동화는 마무리된다.

이 이야기를 꺼낸 건, 요즘 들어 ‘자신에게 맞는 커뮤니티’를 찾는 일이 이런 과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사람들은 무언가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자신에게 꼭 맞는 공동체와 커뮤니티를 바란다. 하지만 실상 커뮤니티는 편안함보다는 이질감을 느끼게 하고, 자꾸만 멈춰 서게 하고, 천천히 흘러가면서 무언가를 느끼게 하는 존재에 가까운 것 같다.

빠르고 효율적인 삶을 추구하는 현실 속에서 이러한 공동체나 커뮤니티가 해체돼 간 것은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수순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모두가 빠르게 굴러가는 가운데, 서로 다른 존재들과 더불어 한다는 것은 더욱 요원한 일이 돼버렸다.

커뮤니티 전성시대?

마치 커뮤니티 전성시대인 양 보일 정도로, ‘커뮤니티’, ‘공유’를 콘셉트로 삼은 다양한 서비스와 상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런데 막상 그 안을 들여다 보면, 본질은 커뮤니티가 주체가 되지 않는다. 커뮤니티는 대상이 되어 그 안으로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로 하여금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하게 하는 방식일 때가 많다. 또한 느슨하기만 한 관계를 강조하면서 ‘귀찮은 것들은 하지 않아도 되고, 공유를 통한 경제적 이득만을 누릴 수 있다’고 호도하는 것은 커뮤니티를 이용한 비즈니스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친구나 연인 관계를 놓고 보더라도, 어떤 것도 책임지려 하지 않고,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 관계를 신뢰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무엇이 커뮤니티를 커뮤니티답게 만드는가? 커뮤니티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존재하지만, 핵심 요소들을 추려 볼 수는 있다. 예컨대 커뮤니티는 특정 지역(혹은 공간)을 함께 공유한다. 또한 구성원들이 상호작용을 하며 서로에 대한 유대감과 소속감을 공유한다. 이 모든 요소는 일시적이거나 잠정적이지 않고 지속가능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공생을 도모하는 사회적 안전망이 된다. 즉 단순히 많은 사람이 모여 있거나 연결된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셈이다. 서로의 일상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만 한다.

커뮤니티로 모인 사람들이 스스로 주체가 되는 구조, 예를 들어 기획 및 생산, 운영에 이르는 전 과정에 참여하고 함께 책임질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면, 아무리 커뮤니티를 콘셉트로 삼는다 하더라도 속 빈 강정일 뿐이다. ‘커뮤니티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창출된 사업’과 ‘커뮤니티를 이용하는 사업’은 엄밀히 구분돼야 한다.

건너뛰지 말아야 할 것

이가 빠진 동그라미처럼 모든 사람은 원래 깨어진 존재다. 삶이 충만해지는 것은 나의 부족한 부분, 나의 필요를 완벽하게 채워주는 존재를 만났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처럼 이가 빠진 이들과 더불어 살아갈 때이며, 그런 순간들이 모여 커뮤니티를 구성하는 것 아닐까?

사는 게 너무 바쁘고 고되기에 느슨한 관계만을 찾는 것도 한편으론 이해가 간다. 하지만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커뮤니티는 단 한두 사람이라 하더라도, 서로를 인정해 주고 물질적·심리적 위협들로부터 나를 지켜주고 지지해 줄 수 있는 커뮤니티다. 이런 작지만 단단한 단위가 있어야 느슨한 관계, 커뮤니티들이 비로소 빛을 발할 수 있다.

커뮤니티가 처음부터 거창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현재 97개 협동조합으로 구성돼 8만 명 넘는 직원을 고용하고 있는 스페인의 몬드라곤 역시 처음에는 5명의 구성원으로 시작했다. 몬드라곤의 설립자인 호세 마리아 신부는 내전 과정에서 병들고 가난해진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첫걸음을 떼었을 뿐이다. 서로를 인정해 주고, 물질적·심리적 위협들로부터 나를 지켜주고 지지해 줄 수만 있다면 작은 규모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협동조합을 만들어야 한다’거나 ‘커뮤니티가 우리 사회의 경제적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결론으로 섣불리 달려가지 않았으면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사회적 관계망 지수를 측정하기 위해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친지나 가족, 이웃, 친구 등이 있는지’를 질문한다(그리고 한국은 매년 최하위를 맴돌고 있다). 이 질문에서 시작해 보고 싶다. 힘들 때 위로받고 도움받을 수 있는 관계와 관계망들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지 말이다.

익숙한 모습으로 데굴데굴 굴러간다면…

커뮤니티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회적 안전망 역할을 한다는 점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터이다. 그런데 ‘안전’의 의미가 변화하고 있다는 점은 아직 충분히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 기본적인 섭식의 문제가 생존을 위협하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가 좀 더 복잡한 양상을 띤다. ‘밀레니얼 세대’로 호명되는 이들은 대등한 관계, 그리고 내 존재가 충분히 존중받을 수 있는 조건에서 안전함을 느끼고 있다. 성별, 나이 등의 위계로 인해 억눌리고 침범당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 그러한 커뮤니티는 이들에게 더는 안전망일 수 없다.

기존의 공동체들이 커뮤니티의 핵심 가치를 회복하고 갱신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이른바 ‘커뮤니티’라고 이름 붙인 상품과 서비스들이 사람들의 필요와 욕구를 만족하게 하며 세력을 확장해 가고 있다. 지금이라도 시작해 보자. 커뮤니티는 우리 존재의 또 다른 표현이고, 그래서 더욱 우리가 직접 주체가 되어 만들고 갱신해 갈 수 있어야 한다. 이가 빠진 동그라미가 자신에게 맞는다고 생각되는 익숙함을 버렸을 때 비로소 다시 즐거운 여정이 시작되었다는 동화의 결말을 떠올려 본다. 익숙한 모습으로 계속 데굴데굴 굴러가다가는, 꽃도 나비도 모두 놓치고 만다.

양동수 (사회혁신기업 더함 대표)

해당 글은 2019년 11월 4일자 <한겨레신문>을 통해 발행된 칼럼입니다.

커뮤니티의 ‘생명력’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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