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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디벨로퍼, 개발업 메카 강남을 떠나 을지로·명동에 입성하다

from. 이윤형

[from더함] 더함피플의 생각, 일상, 특별한 순간들을 나눕니다. 서로의 이야기에 대한 이해와 공감으로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소소한 이야기들이 모여 더욱 풍성해질 더함을 기대해봅니다.

공간과 사람 사이에도 ‘관계’가 있다.

사람은 끊임없는 관계의 매트릭스 속에 놓여 있다. 태어나자마자 맺게 되는 부모와의 관계부터 어릴 적 만난 또래친구들과의 관계, 선생님과의 관계, 선후배 관계, 연인 관계까지. 우리는 관계 속에서 살다 관계 속에서 죽는다.

우리의 관계는 사람뿐만 아니라 공간과도 이어진다. 수많은 공간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 우리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단연 ‘일터’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기에 그렇고, 한 사람의 활동 반경에서 중심축이 되기에 그렇다. 이직해서 이사 가는 사람은 있어도, 이사 가서 이직하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강남과 을지로, 아니 GBD와 CBD!

나는 3년 남짓 강남에서 일했고, 을지로에서 일한 지는 막 두 달이 되어 간다. 이 두 지역을 부르는 약어가 있다. 내가 지은 용어는 아니고, 상업용 부동산 시장에서 쓰이는 소위 ‘업계 용어’이다. 삼성동부터 강남역으로 이어지는 테헤란로 일대의 업무지구를 GBD(Gangnam Business District), 시청과 을지로 일대를 CBD(Central Business District)라고 부른다. 일터로 맺어진 인연인 만큼 강남, 을지로라 부르기보다 GBD, CBD라 하고자 한다.

얼핏 비슷해 보이는 사람도 막상 친해지면 제각기 다르듯이, 비슷해 보이는 공간도 머물러 보면 참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내가 머물고 일했던 GBD와 CBD는 멀리서 보면 고층빌딩이 밀집해 있다는 점에서 비슷해 보이지만, ‘업무중심지’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역사와 조성 배경, 외양 등 많은 부분에서 대조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점은 부동산디벨로퍼로서 나에게 굉장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강남,
편리함과 효율로 무장된 부동산개발업 업무지구

나는 2017년도에 GBD에서 일을 시작했다. 정확히는 삼성역과 선릉역 사이 포스코사거리였다. GBD에는 부동산 개발과 관련한 회사들이 밀집되어 있다. 피데스, MDM, 신영 등의 시행사, 한국토지신탁, 대한토지신탁, 코람코자산신탁 등의 신탁사, 율촌, 화우 등의 법무법인 등이 삼성/선릉을 중심으로 군집되어 있는데, 실례로 국내 14개 부동산신탁사 중 12개가 이곳에 있다.

여의도를 빼고 한국의 금융을 이야기할 수 없듯 GBD를 빼고 한국의 부동산개발을 이야기하기 어렵다. 어떻게 GBD에 이런 모습이 형성됐을까? 짧은 식견이지만 보고 들은 사실에 기반한 나의 뇌피셜은 이렇다. 우리나라 부동산 개발은 줄곧 시공사 주도로 이루어져 왔다. 시공사의 신용을 근거로 자금을 조달하고, 래미안, 자이, e-편한세상 등 시공사의 브랜드 파워로 부동산 상품을 판매했다. 그런 흐름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변화를 맞게 되는데, 분양성이 악화되면서 가격상승을 전제로 과도하게 사업을 확장한 시공사들이 줄도산하고, 시공사 신용에 의존하여 대출을 한 금융기관들도 시공사와 함께 줄줄이 무너졌다. 한 차례 홍역을 앓은 부동산 개발시장은 ‘계란을 여러 바구니에 나눠 담기’ 시작한다. 시공사가 단독으로 부담하던 Risk를 시행사, 신탁사, 증권사 등 여러 Vehicle이 나눠 갖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이는 여러 회사들의 협업 구조로 이어진다. 잦은 협업으로 업체 간 집적의 필요성이 생기고, 하나 둘 업체들이 모여들며 타운화된 것이다. 이제 GBD 올인원까지는 아니지만, 부동산개발을 하는 사람이라면 토지매입~준공에 걸친 개발 과정에서 GBD를 거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최근 펀드, 리츠 등 부동산간접투자기구들이 개발사업의 주체로 떠오르고 있는데, 이를 관리하고 운영하는 자산운용사들과 리츠AMC들도 GBD에 자리해 있으니 앞으로도 GBD의 위용은 쉽게 꺼지지 않을 것 같다.

이처럼 많은 관계사가 모여 있어 GBD는 일하기가 무척 편하다. PF대출(부동산 개발사업 자체를 담보로 시행주체에 자금을 빌려주는 대출 상품)을 위한 대출약정 체결이 도보 거리 안에서 해결되고, 관계사 미팅도 어렵지 않다. 관련 종사자를 만날 수 있는 업계 모임도 여의도, 강남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어 참석이 수월하다. 이동도 무척 편리하다. 지하철 출구를 나서면 마치 공항이나 터미널에 죽 늘어서 있는 택시처럼 전동킥보드가 일렬종대로 줄지어 서있다. 킥보드 설치량이 다른 지역과 비교해 압도적인데, 지하철 한 정거장은 3~4분이면 너끈히 갈 수 있다. 한마디로 GBD는 편리함과 효율로 무장된 ‘찐 업무지구’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참 아이러니하게도 편리하고 효율적인 이 공간은 서둘러 떠나고 싶은, 차갑고 딱딱한 공간이기도 했다.

편리함과 효율성으로 무장한 고층건물들이 즐비해 있는 강남의 모습. (사진 제공: 이윤형)

을지로의 매력, 같은 동네에서 일하고 놀 수 있다는 것

짧은 대화만 나눠도 깊이와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있다. CBD에서 일한 지 갓 두 달이 되었지만, CBD의 깊이와 매력을 알아차리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GBD가 ‘찐 업무지구’로서 편리함과 효율을 자랑한다면, CBD는 사대문 안 켜켜이 쌓인 역사적 아우라와 그 속에 담긴 다양성으로 대체 불가한 매력을 내뿜는다. 건축가 김수근씨의 설계로 건물 외관을 도자기 장식으로 꾸민 쌍용빌딩, 국내 최초 유리를 이용한 커튼월 방식이 도입된 가톨릭회관,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여성단체인 한국YWCA의 회관 등 스쳐 지나가는 건물들 대부분이 나보다 나이가 몇 십 년씩은 많다. 그 역사적 깊이를 자주 들여다보지는 못하지만, 퇴근하며 천천히 걸을 땐 무언가 모를 은은한 기운이 느껴진다.

일하는 동네를 이곳으로 옮기며 퇴근 후 일상이 많이 바뀌었다. 원래 ‘땡’치면 뒤도 안 보고 회사 주변을 떠나기 바빴는데(물론 칼퇴는 거의 없었지만), CBD에서는 퇴근 후 가고 싶은 곳을 미리 서치하고 심지어 SNS에 포스팅까지 한다. 가히 큰 변화라 할 수 있다. 요새 을지로 곳곳에 숨어 있는 노포와 길거리 빨간색 간이테이블에서 마시는 맥주, 간판도 없이 인스타 보며 ‘찾아찾아찾아’ 가는 힙한 가게들에 빠져 있다. 퇴근하고도 나의 좌표는 여전히 CBD다.

을지로의 매력에 빠진 후로는 퇴근 후 가고싶은 곳을 미리 서치해 방문하고 SNS에 포스팅까지 한다는 이윤형 매니저. (사진 제공: 이윤형)

건축가 황두진 씨는 전층이 단일용도로 되어 있는 건축물을 ‘시루떡’에, 층별로 서로 다른 기능을 갖는 건축물을 ‘무지개떡’에 비유하여 ‘무지개떡 건축’이라는 새로운 도시건축의 유형을 이야기했는데, CBD 일대를 하나의 건축지형으로 본다면 일터와 놀이터가 뒤섞인 ‘무지개떡 타운’이 아닐까 한다.

최근 CBD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금요일 저녁 만선호프의 장관을 보면 누구라도 입이 벌어질 것이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다니! 오래 되었을 뿐 특별할 것 없었던 CBD가 조금씩 바뀌더니 어느새 ‘힙지로’가 되었다. 신도시, 호텔수선화, 호랑이, 만선호프 등 매력적인 공간이 늘더니 이제는 을지로를 즐기기 위한 지도와 잡지까지 나왔다. 이런 변화를 가장 먼저 감지하고 글로 옮긴 에스콰이어 코리아의 박찬용 에디터는 을지로를 힙하게 만든 요인을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첫째, 사실상 1~5호선까지 모두 을지로 근처를 지나는 만큼, 교통편이 매우 편리하다는 점. 둘째, 대부분의 가게가 1층 ‘로드샵’에 위치하지 않지만, 사실상 SNS가 이들의 간판 역할을 해준다는 점. 셋째, ‘힙 프로메테우스'(세련됨의 불꽃을 들고 오는 이들)의 양상이 다른 권역과 달리 굉장히 다양하다는 점.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이 지역을 찾는 이들이 인근의 소비력 있는 대기업 직장인들이라는 점. 다시 말해, 도심이 가지는 레트로한 공간에 젊은 프로메테우스들의 감각적인 활동이 더해져 뉴트로함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일터와 놀이터가 섞인 ‘무지개떡 타운’ 을지로. 고층 빌딩과 오래된 낮은 건물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색적인 광경을 볼 수 있다. (사진 제공: 이윤형)

‘무장해제’하고 머물고 싶은,
우리의 삶과 닮아 있는 공간

대부분의 업무지구에는 우리가 친해질 공간이나 여지가 별로 없다. 빽빽이 들어찬 오피스 건물들은 나와 별 관련 없는 누군가의 공간이며, 전혀 새로운 느낌이 아니라면 오피스 뒤에 자리한 음식점들에도 별다른 정을 내기 힘들다. 편리함, 효율, 깔끔함만으로 무장된 공간에서 일 얘기 말고는 달리 나눌 이야기가 없다.

마음을 열고 친해지려면 말쑥한 차림보다 슬리퍼 끌고 만날 수 있는 친숙함이 필요한데, CBD에는 그런 공간이 여기저기 보인다. 상술한 박찬용 에디터의 분석처럼, CBD는 1) 개성 있는 공간 2) 운영자 3) 공간을 채울 사람이라는 삼박자를 잘 갖췄고, 이는 CBD에서 ‘사람과 공간의 풍성한 관계’를 만들었다. 촌스럽고 낡았지만 정감 가는 공간은 우리 마음속 차가운 무언가를 무장해제 시킨다. ‘무장된 공간’인 GBD와 달리, CBD는 ‘무장해제시키는 공간’으로서 우리 곁에 자리한다.

공간은 사람을 만나 의미를 갖고, 공간과 관계가 생긴 사람은 그곳에 머물고 싶어지게 마련이다. 이미 꽉 짜여져 무장된 GBD와 달리, CBD는 우리가 채워갈 페이지가 넉넉한 공간이다. 채워가는 이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는 공간, 내가 새롭게 채워갈 수 있는 공간. 앞으로도 한동안 을지로/명동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공간 중 하나가 될 것 같다.

from. 이윤형

더함 부동산사업개발실 매니저. a.k.a. 더함의 열정만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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